한국 개신교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형성과 관계 (2)
By John So

한국의 상황과 개신교의 청교도주의
먼저 당시 한반도 상황을 생각해보면 내치와 외교가 혼동 가운데 있던 시기였다. 외교는 조일조약을 기점으로 서구 열강들이 한반도 내에서 주도권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내치에 압력을 가하는 부분이 많았다. 또한 고종을 비롯한 민비와 민씨 척족은 외교를 이용해서 한반도의 상황을 타파하고자 했으나 이들의 한계는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상황에서 시작했다. 이러한 모습은 일제가 열강들의 주도권 싸움에서 점차 그 패권을 거머쥐면서부터 국내의 권력이 해체되었다. 이것은 당시 전체적인 우리나라의 배경뿐만 아니라 내한 선교사의 선교와 이를 수용한 한국 현지인에게도 그대로 영향을 주었다. 특히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해외 미국 공사의 중립 외교라는 방침을 따라야 하는 기본적인 전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정교분리라는 방침에 익숙했던 상황이었다. 이는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신앙 정착에 어느 정도 그 방향을 설정해주었다. 선교사는 한국의 어려운 상황을 지켜봤지만,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있었고 냉철하게 보면 제삼자였던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대하는 정도가 달랐다. 헐버트Homer B. Hulbert,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선교사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선교사가 한국의 정치적인 내치에 관여하지 않고 신앙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지켜본 민족 운동 계열의 한국인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이들은 더욱 민족 교회로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모습보다는 관념적인 신앙을 강조했으며, 이를 한국 현지인에게도 강조했다. 물론 한국의 대부분 항일 운동은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이 주도했지만, 여기서는 글의 흐름을 위해 논외로 두겠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보수 신앙은 1907년 “평양의 부흥 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 운동”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이러한 신앙 부흥은 한국 상황에 반응하기보다는 신앙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또한 비개신교인에게는 한국의 어려움에서 도피하거나 회피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보수적인 신앙은 더욱 부끄럽게 비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이르러 이들 군국주의의 핵심에는 일왕의 종교적인 면모가 강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난 부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예는 신사 참배 문제가 있다. 또한 이와 비슷한 의례 등이 기독교 학교와 기관 등에 적용되면서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곧 폐쇄 조치까지 연결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 군국주의는 말기에 종교성을 짙게 드러냈는데 이를 처음부터 종교적인 문제, 우상 숭배로 예민하게 받아들였던 이들은 소위 말해 청교도주의 신앙을 간직했던 이들이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한국 교회들도 신사 참배와 그와 연관된 의례를 두고 교단적인 차원에서 수용하느냐 마느냐의 갈등을 겪으면서 결국 수용해나갔다.
하지만 끝까지 신사 참배를 반대했던 이들 중 장로교의 주기철, 조용학, 최상림, 최봉석, 감리교의 이영한, 강종근, 권원호, 성결교의 박봉진, 김연 등 보수적인 신앙인들이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결사 각오라는 태도를 견지한 것은 신사 참배는 우상 숭배라는 사상이며 이는 절대 수용 불가라는 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군국주의 식민 정책의 전체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그 핵심에는 일왕을 현인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로 삼고 식민지를 삼으려고 했으며 강제로 점령한 나라에 황민화 운동을 목적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신사 참배라는 것은 국가적 의례가 아닌 종교로서 숭배함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흔히 국가(일제)-교회(한국 교회)의 갈등이 아닌 종교(일제)-종교(교회)의 갈등으로 보는 연구들은 일본을 중심으로 많이 존재한다. 이렇게 보수 신앙이 신사 참배를 우상 숭배로 보고 거부한 교-교敎-敎 갈등의 모습이 곧 정-교政-敎 갈등이 생기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한 이들보다 더욱 그 고통을 직접 감내하는 의지로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보수 신앙의 신념에서 비롯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보수 신앙이 때로는 타협하지 않는 면이 있고, 사회·정치에 순응하지 않더라도 위와 같은 상황에서 보여주는 사회의 역기능이 후대에 순기능을 했던 면으로 평가되는 것은 보수주의 신앙에 대한 평가를 역사적인 흐름에서 장단점의 면을 살펴야 함을 보여준다.
한국 개신교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형성과 관계 (3)
소요한 교수 Ph.D
감리교신학대학교 한국교회사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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